과학부터 영화까지, 그리고 스포츠부터 정치까지, 로스앤젤레스는 자기 분야에서 정상에 오른 위대한 여성들의 본거지입니다. 이들은 의학을 연구하고, 스포츠 선수권에 오르고, 시민들의 권리를 수호하고, 예술계에 지대한 공헌을 해온 장본인들입니다. 3월 8일 국제 여성의 날이 아니어도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나거나 이곳을 자신의 고향으로 삼았던 위대한 여성들을 기릴 수 있는 여정에 함께해 보세요.
알린 반스덜(Aline Barnsdall)
석유업체를 상속받은 알린 반스덜은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 에게 로스앤젤레스 최초의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된 할리혹 하우스(Hollyhock House) 설계를 의뢰했던 인물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녀는 1919년 35 에이커(약 0.14㎢) 규모의 올리브 힐(Olive Hill) 토지를 매입하여 공사를 시작해 1922년 완공했습니다.
그리고 1927년에는 반스덜 예술 공원(Barnsdall Art Park) 중 11.5 에이커(약 0.05㎢)를 로스앤젤레스시에 기부했습니다. 반스덜 부인은 유언에서 공원을 “지역 사회의 모두가 즐거울 수 있도록 (...) 영원히 대중이 이용할 수 있게 해달라. (그리고) 예술 목적의 건물만을 건축해달라”라고 당부했습니다. 로스앤젤레스시 문화부에서는 반스덜 공원에서 문화 및 예술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며, 그 토지는 휴양 및 공원 관리부에서 관리를 맡고 있습니다.
또한 반스덜 부인은 할리우드 볼(Hollywood Bowl)에 지대한 재정 지원을 하고, 건축가 리처드 뉴트라(Richard Neutra)와 루돌프 쉰들러(Rudolph Schindler), 사진사 에드먼드 테스케(Edmund Teske) 등의 전문가들에게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만다 고먼(Amanda Gorman)
로스앤젤레스 토박이인 아만다 고먼 시인은 2021년 1월 조 바이든(Joe Biden) 대통령과 부통령 카말라 해리스(Kamala Harris)의 취임식에서 <우리가 오르는 언덕>(The Hill We Climb)을 낭송해 국제 사회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역사상 가장 젊은 나이에 등단한 고먼 시인은 버락 오바마(Barack Obama) 전 대통령과 미셸 오바마(Michelle Obama) 전 영부인, 오프라 윈프리(Oprah Winfrey), 린마누엘 미란다(Lin-Manuel Miranda) 등 수많은 공인들의 찬사를 받은 인물입니다. 낭송회 뒤 시인의 책 《우리가 오르는 언덕》과 《변화는 노래한다 - 아이들을 위한 애국가》(Change Sings: A Children's Anthem)는 아마존 베스트셀러 도서 1위를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2021년 3월 출간된 시인의 시집에는 오프라 윈프리의 서문이 실려 있습니다.
고먼 시인은 제55회 슈퍼볼(Super Bowl LV) 경기 전 행사에서 영상을 통해 동전 던지기 명예 캡틴이었던 3명의 근로자들을 칭송하는 자신의 시 <캡틴들의 합창>(Chorus of the Captains)을 낭독했습니다. 미셸 오바마 전 영부인이 진행한 시인의 인터뷰는 타임(TIME)지 커버 스토리에 소개되었으며, 타임지 선정 100명의 차세대 인물 명단에 등재되었습니다. 린마누엘 미란다는 평론에서 자신이 “평생 동안 (그녀의) 팬이었다”라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애나 메이 웡(Anna May Wong)
로스앤젤레스에서 웡류총(Wong Liu Tsong)이라는 이름으로 출생한 중국계 미국인 2세 애나 메이 웡은 영화계 스타이자 패션계 유명인사로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무성 영화 시대부터 시작하여 유성 영화, 텔레비전, 무대 공연, 라디오까지 다양한 활동을 이어 왔습니다. 최초의 중국계 미국인 할리우드 영화 배우 스타가 된 웡 배우는, 영화계의 황금기 시절 전설적인 배우였던 더글러스 페어뱅스(Douglas Fairbanks)와 바그다드의 도둑(The Thief of Baghdad, 1924), 마를레네 디트리히(Marlene Dietrich)와 상하이 익스프레스(Shanghai Express, 1932)에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할리우드 영화에서 틀에 박힌 드래곤 레이디(Dragon Lady, 무자비하고 사악한 힘을 자랑하는 글래머 여성)와 버터플라이(Butterfly, 바람기 있고 경박한 여성) 이미지로 연기하는 데 싫증이 난 웡은 1928년 유럽으로 건너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됩니다. 유럽에서 지내는 동안 그녀는 런던 무대에서 로런스 올리비에(Laurence Olivier)와 함께 서클 오브 초크(A Circle of Chalk)에 출연했습니다. 1930년대 후반에는 패러마운트 픽처스(Paramount Pictures)에서 제작된 B급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는데, 그녀가 맡은 역할은 긍정적인 이미지의 중국인 또는 중국계 미국인이었습니다. 그러다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그녀는 일본에 고전하는 모국을 돕기 위해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1951년 리우 총 마담의 갤러리(The Gallery of Madame Liu-Tsong)에서 최초의 아시아계 미국인 진행자라는 역사적인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한 해 전인 1960년에는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Hollywood Walk of Fame)에 자신의 이름을 새긴 별을 받는 영예를 누렸습니다. 애나 웡은 도로시 댄드리지(Dorothy Dandridge), 돌로레르 델 리오(Dolores del Río), 메이 웨스트(Mae West)와 더불어 할리우드와 라 브레아(La Brea)에 설치된 할리우드로 향하는 길(Gateway to Hollywood) 조각상으로 새겨진 4명의 선구적인 여성 배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2020년 3월에는 타임(TIME)지에서 지난 10년 간 가장 영향력이 컸던 여성을 꼽는 올해의 여성 100인으로 선정되었습니다.
비욘세(Beyoncé)
뉴요커(The New Yorker)에서 “21세기의 가장 핵심적이고 매력적인 음악가인 (...) 100년이 넘도록 이어진 팝 시대의 산 증인이자 결정체”라고 평가한 비욘세는 텍사스(Texas) 주 휴스턴(Houston) 출신으로, 역사상 최고 매출액을 기록한 걸그룹 데스티니 차일드(Destiny’s Child)의 리드 보컬으로 유명세를 얻었습니다. 그녀는 디지털판과 디스크판, 그리고 6천만 장의 데스티니 차일드 음반을 포함해 전세계에 3억 3천만 장의 음반을 판매했습니다. 퀸 베이(Queen Bey)라고도 불리는 비욘세는 28개의 그래미상(Grammy Awards)을 수상했을뿐 아니라, 2010년에는 무려 6개의 상을 수상해 한 회에 가장 많이 수상한 여성 아티스트로 기록되기도 했습니다. 2020년 3월에는 타임(TIME)지에서 지난 10년 간 가장 영향력이 컸던 여성을 꼽는 올해의 여성 100인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비욘세는 활동력이 강한 사람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녀는 보그(Vogue)지에서 자신을 “현대의 페미니스트”라 밝히기도 하고, 아프리카계 미국인에 대한 경찰의 무자비함을 끊임없이 지적해왔습니다.
오랫동안 성소수자(LGBTQ)들을 지지해온 그녀는 동성혼을 지지한다고 공식적으로 밝힌 바가 있습니다. 또한 성소수자들과 그 커플들을 자기 뮤직비디오 포메이션(Formation)과 올 나잇(All Night)에 출연시키고, 특히 포메이션 월드 투어(The Formation World Tour) 중에는 헤일로(Halo) 곡을 공연하며 올랜도 펄스(Orlando Pulse) 나이트클럽 총격 사건 피해자들과 생존자들을 기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2019년에는 제이Z(Jay-Z)와 함께 글라드(GLAAD)에서 성소수자들을 존중할 것을 장려하는 데 큰 공헌을 한 이들에게 수여되는 뱅가드 어워드(Vanguard Award)를 수상했습니다. 제65회 그래미 시상식에서 비욘세가 Renaissance 앨범으로 베스트 댄스·일렉트로닉 앨범상을 받으며, “댄스·일렉트로닉 장르의 요람인 퀴어 여러분이 보내준 사랑에 감사드린다”라는 수상 소감을 전해 스타들의 환호를 받았습니다.
비디 메이슨(Biddy Mason)
과거 노예 생활을 했던 브리짓 비디 메이슨(Bridget “Biddy” Mason) 여사는 로스앤젤레스 부동산계의 선구적인 사업가이자 호평받는 자선가였습니다. 메이슨 여사는 1856년 해방되어 3명의 딸을 데리고 로스앤젤레스에 정착해 조산사로 일했습니다. 위키백과(Wikipedia)에 따르면 메이슨 여사는 조산사로 일하는 동안 수백 명의 아이의 출생을 도왔으며, 다른 여성 노예들에게서 배운 약초학 지식을 활용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천연두에 걸린 환자들을 치료하는 데 힘썼다고 합니다. 근검절약과 저축이 몸에 배여 있던 덕분에 그녀는 모은 돈으로 부동산을 매입하여 로스앤젤레스에서 최초로 토지를 보유한 아프리카계 여성이 되었습니다.
1872년에는 메이슨 여사와 사위 찰스 오언스(Charles Owens)는 함께 로스앤젤레스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교회인 아프리카 감리교 감독교회(the First African Methodist Episcopal Church)를 설립했습니다. 그리고 스프링(Spring) 가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회의를 거친 뒤 교회 토지를 기부할 것을 결심했습니다. 메이슨 여사의 뛰어난 투자 안목 덕분에 로스앤젤레스 시내가 성장하면서 그녀의 보유한 부동산은 핵심 매물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무려 30만 달러(약 36억 원)에 달하는 자산가가 된 여사는 관광객 지원 센터와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아동들을 위한 초등학교 설립 등의 자선 사업을 지원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메이슨 여사는 1891년 1월 15일 향년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현재는 보일 하이츠(Boyle Heights)에 위치한 에버그린 묘지(Evergreen Cemetery)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빌리 아일리시(Billie Eilish)
빌리 아일리시 파이럿 베어드 오코넬(Billie Eilish Pirate Baird O'Connell)은 2001년 12월 18일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나 하이랜드 파크에서 자랐습니다. 14세에 빌리 아일리시는 오빠 피니어스(Finneas)가 작곡하고 프로듀싱한 데뷔 싱글 ‘오션 아이즈(Ocean Eyes)’를 발표했습니다. 그로부터 10년이 채 되기도 전에 아일리시는 아홉 번의 그래미상, 두 번의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 세 번의 MTV 비디오 뮤직 어워드, 세 번의 브릿 어워드, 두 번의 골든 글로브상, 두 번의 아카데미상을 수상하고, 두 차례 기네스 세계 기록을 세웠습니다. 빌리 아일리시는 2019년, 타임지 선정 차세대 리더 100인(TIME100 Next)에 처음으로 이름을 올렸고, 2년 뒤에는 ‘타임지 선정,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TIME100)에 올랐습니다.
2019년에 발매된 아일리시의 첫 번째 정규 앨범 <When We All Fall Asleep, Where Do We Go?(우리 모두 잠들면, 우리는 어디로 갈까?)>는 나오자마자 ‘빌보드’ 200과 UK 앨범 차트 정상에 올랐습니다. 앨범 발매와 동시에 14곡을 ‘빌보드’ 핫 100 차트에 진입시키며 여성 아티스트 역사상 최다 곡 동시 진입 기록을 경신했습니다. 앨범의 다섯 번째 싱글, ‘Bad Guy(배드 가이)’로 첫 번째 ‘핫 100’ 1위를 차지하며 21세기에 태어난 아티스트 중 최초로 싱글 차트 정상에 오른 아티스트가 됐습니다. 2020년 1월에 열린 제62회 그래미 어워드에서 아일리시는 <When We All Fall Asleep>로 올해의 앨범상, ‘Bad Guy’로 올해의 레코드상과 올해의 노래상, 최우수 신인 아티스트상을 받아 ‘빅 4(Big Four)’ 부문을 휩쓴 최연소 아티스트가 됐습니다.
17세에는 <노 타임 투 다이(No Time to Die)>의 주제곡을 불러 제임스 본드 시리즈 역사상 최연소로 제임스 본드 주제곡을 부른 아티스트가 됐습니다. <노 타임 투 다이>는 그래미 비주얼 미디어 작곡상(Best Song Written for Visual Media), 골든 글로브 주제가상(Best Original Song), 아카데미 주제가상((Best Original Song)을 받아, 빌리 아일리시는 2000년대 출생자로는 최초로 아카데미상을 받은 아티스트가 됐습니다.
2021년 7월에 발매된 두 번째 앨범 <Happier Than Ever(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해)>는 ‘빌보드’ 200에 1위를 기록했고, 20여 개국에서 차트 정상에 올랐습니다. 콘서트 영화 <해피어 댄 에버: LA로 보내는 러브레터(Happier Than Ever: A Love Letter to Los Angeles)>는 같은 해 9월, 디즈니플러스(Disney+)에서 공개됐습니다. 로버트 로드리게스(Robert Rodriguez)와 패트릭 오스본(Patrick Osborne)이 감독한 이 영화는 실사와 애니메이션이 혼합한 형식으로 앨범에 수록된 16개 트랙을 아일리시, 피니어스, LA 필하모닉이 함께 공연하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영화는 현장 관객 없이 할리우드 볼(Hollywood Bowl)에서 촬영됐습니다.
2023년, 아일리시는 블록버스터 영화 <바비(Barbie)>의 사운드트랙에 수록된 ‘What Was I Made For?(난 뭘 위해 태어난 걸까?)’를 발표했습니다. ‘What Was I Made For?’는 골든 글로브 주제가상, 그래미 어워드 올해의 노래상과 비주얼 미디어 작곡상을 받았고,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주제가상을 거머쥐며 최연소 아카데미상 2회 수상자로 등극했습니다.
빌리 진 킹(Billie Jean King)
역사상 가장 위대한 테니스 선수로 꼽히는 롱비치 출신의 빌리 진 킹은 동네 코트에서 테니스를 배우고, 행콕 파크(Hancock Park)에 있는 로스앤젤레스 테니스 클럽(Los Angeles Tennis Club)에서 테니스 실력을 연마했습니다. 15세에 프로로 데뷔했습니다.
22년간 선수 생활을 하며 빌리 진 킹은 39개의 메이저 타이틀(단식에서 12회, 여자 복식에서 16회, 혼합 복식에서 11회)을 거머쥐었습니다. 1972년 프랑스 오픈(French Open) 우승으로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그녀는 윔블던(Wimbledon)에서 20회 우승(단식 6회, 여자 복식 10회, 혼합 복식 4회)을 기록했습니다. 3년간 페더레이션 컵(Federation Cup)에서 미국 대표팀 주장으로 활약하며 7번의 우승을 이끌기도 했습니다. 2020년, 페더레이션 컵은 그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빌리 진 킹 컵(Billie Jean King Cup)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킹은 1972년 스포츠 주간지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Sports Illustrated)>에서 선정한 올해의 스포츠맨상(Sportsman of the Year award)을 UCLA의 존 우든(John Wooden) 감독과 공동 수상했으며, 1987년에는 국제 테니스 명예의 전당(International Tennis Hall of Fame)에, 1990년에는 미국 여성 명예의 전당(National Women's Hall of Fame)에 헌액되고, 2009년에는 대통령 자유 훈장(Presidential Medal of Freedom)을 받는 등 많은 수상의 영예를 안았습니다. 2013년에는 미국 게이 레즈비언 스포츠 명예의 전당(National Gay and Lesbian Sports Hall of Fame)에 최초로 헌정된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녀의 고향에서는 레크리에이션 파크(Recreation Park)에 빌리 진 킹 테니스 센터(Billie Jean King Tennis Center), 롱비치 다운타운에 빌리 진 킹 중앙 도서관(Billie Jean King Main Library)을 설립해 빌리 진 킹을 기리고 있습니다. 모교인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로스앤젤레스(Cal State LA)는 4만 4,515제곱미터 규모의 운동 시설을 빌리 진 킹 스포츠 복합단지(Billie Jean King Sports Complex)로 이름 붙였습니다. 2022년에는 그녀가 법안 통과를 위해 증언했던 타이틀 나인(Title IX) 제정 50주년을 기념해 빌리 진 킹의 동상이 캠퍼스 부지에 세워졌습니다.
오랫동안 여성의 권리를 옹호해 온 빌리 진 킹은 양성평등과 사회 정의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1973년에는 ‘세기의 대결(Battle of the Sexes)’로 불리는 유명한 테니스 경기에서 1940년대 세계 랭킹 1위였던 바비 릭스(Bobby Riggs)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같은 해에 빌리 진 킹은 여자 테니스 협회(Women's Tennis Association)를 설립했고, 1974년에는 비영리 단체인 여성 스포츠 재단(Women's Sports Foundation)을 세웠습니다.
2018년에는 빌리 진 킹과 그녀의 파트너 일라나 클로스(Ilana Kloss)는 로스앤젤레스 다저스(Los Angeles Dodgers)의 소액 구단주 자격을 얻었습니다. WNBA LA 스파크스(LA Sparks) 공동 구단주가 되기도 했습니다. 2년 뒤, 두 사람은 2022년 미국 여자 사커 리그(National Women's Soccer League)에 데뷔하는 엔젤 시티 FC(Angel City FC)에 투자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캐롤 케이(Carol Kaye)
역대 최고의 세션 베이시스트로 꼽히는 캐롤 케이는 50년이 넘는 그의 음악 경력 동안 1만 회의 연주를 한 음악가입니다. 워싱턴(Washington)주 에버릿(Everett)시에서 태어난 그녀는 7살이 되어 가족과 산페드로(San Pedro) 북부의 윌밍턴(Wilmington)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기타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던 그녀는 1950년대에 재즈 연주단과 호흡을 맞추며 지내던 중 샘 쿡(Sam Cooke)이 어레인지한 서머타임(Summertime)을 연주하다가 기타리스트를 찾고 있던 프로듀서 로버트 범스 블랙웰(Robert "Bumps" Blackwell)의 눈에 띄게 됩니다. 그녀는 단박에 인기를 얻어 스튜디오에서 가장 많이 찾는 기타리스트가 되었으며, 그곳에서 라 밤바(La Bamba), You've Lost That Lovin' Feelin' 등의 히트곡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던 중 캐피털 레코드(Capitol Records)사에서 베이시스트가 결석하는 바람에 캐롤은 대타 부탁을 받고, 그곳에서 자신의 단짝 베이스 기타를 찾게 됩니다.
그녀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수많은 히트곡을 탄생시킨 로스앤젤레스 스튜디오 음악가들의 모임인 레킹 크루(Wrecking Crew)의 유일한 멤버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캐롤이 연주했던 클래식 곡으로는 낸시 시나트라(Nancy Sinatra)의 These Boots Are Made for Walkin', 아이크 터너(Ike Turner)와 티나 터너(Tina Turner)의 River Deep, Mountain High, The Beach Boys Pet Sounds, 몽키즈(The Monkees)의 Last Train to Clarksville, 소니 앤 셰어(Sonny & Cher)의 The Beat Goes On, 글렌 캠벨(Glen Campbell)의 Wichita Lineman 등 대단히 많은 곡이 있습니다. 그러다 세션 활동에 지친 그녀는 영화와 텔레비전으로 눈길을 돌려 매시(M.A.S.H.), 섀프트(Shaft), 블리트(the Bullitt)와 텔레비전판 미션 임파서블(Mission: Impossible)과 하와이 파이브 오(Hawaii Five-O)의 주제곡을 작곡했습니다. 벌처(Vulture)지에 실린 캐롤과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이제 반쯤 은퇴해 앤틀로프 밸리(Antelope Valley)에서 지내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지금도 스카이프(Skype) 메신저를 통해 강의를 진행하고 책과 DVD를 통해 교습 프로그램을 내고 있다고 합니다.
크리스틴 웨더릴 스티븐슨(Christine Wetherill Stevenson)
피츠버그 페인트사(Pittsburgh Paint Company)를 물려받았던 크리스틴 웨더릴 스티븐슨 여사는 예술에 관심이 많았고, 옥외 극장을 만들어 자기가 만든 연극을 선보이고 싶다는 꿈이 있었습니다. 그 꿈을 깨닫게 된 계기는 1920년 순례자 극장(Pilgrimage Theatre)을 개관하고 자신이 해석한 예수의 삶을 그린 연극 공연이었습니다. 그러나 여사는 1922년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해 세워진 할리우드 순례 기념비(the Hollywood Pilgrimage Memorial Monument, 또는 할리우드 대십자가 the Great Hollywood Cross)는 스티븐슨 여사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스티븐슨 여사의 연극은 1929년까지 매년 여름 공연되었으나, 그해 10월에 발생한 산불으로 인해 원래 있던 목조 십자가가 소실되면서 중단되었습니다.
1931년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산의 입구를 본떠 콘크리트로 지은 새 극장이 개관하며 여사의 공연은 1964년까지 계속되었으나, 결국 2차 세계 대전으로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그후 1941년 로스앤젤레스 카운티가 극장을 소유하게 되었고, 1976년에는 로스앤젤레스 예술계에 큰 공헌을 한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지사의 이름을 따 존 앤슨 포드 극장(John Anson Ford Theatre)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습니다. 오늘날 포드 극장은 로스앤젤레스 최고의 옥외 극장으로 꼽히며 다양한 문화 공연이 열리는 곳이 되었습니다.
코리타 켄트(Corita Kent)
프랜시스 엘리자베스 켄트(Frances Elizabeth Kent)는 아이오와에서 태어나 블레스드 새크라멘트 스쿨(Blessed Sacrament School)을 다녔습니다. 그곳에서 수녀 선생님들 덕분에 예술에 재능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켄트의 가족은 LA로 이주했고, 열여덟이 되던 해에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모 성심 수녀회(Immaculate Heart of Mary)’ 교구에 입회해 메리 코리타 수녀(Sister Mary Corita)라는 이름을 받았습니다. 몇 년 뒤, 그녀는 코리타 수녀(Sister Corita)로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리게 됩니다.
켄트는 오늘날 오티스 예술 디자인 대학(Otis College of Art and Design)이 된 오티스(Otis)와 취나드 예술 학원(Chouinard Art Institute)에서 공부했고, 성모 성심 대학(Immaculate Heart College)에서 학사 학위를,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USC)에서 미술사 석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1938년부터 1968년까지 성모 성심 공동체(Immaculate Heart Community)에 기거하며 일했습니다. 성모 성심 대학에서 미술을 가르치다가 1964년에는 미술학과 학과장이 되었습니다.
코리타 수녀의 수업 방식은 독특했습니다. 그림 200점 그리기나 3시간 동안 자신의 팔을 보지 않고 팔 그리기 같은 과제를 학생들에게 내어 주었습니다. 1950년대 초에는 전국의 진보적인 가톨릭 신자들이 코리타 수녀의 수업을 들으려고 로스앤젤레스로 몰려들었습니다. 학교가 LA의 창작자 커뮤니티와 근접한 덕분에 코리타 수녀는 알프레드 히치콕(Alfred Hitchcock), 버크민스터 풀러(Buckminster Fuller), 찰스와 레이 임스(Charles and Ray Eames), 존 케이지(John Cage), 솔 배스(Saul Bass)와 같은 유명 인사를 특별 게스트로 초청할 수 있었습니다.
독학으로 판화를 익힌 코리타 수녀는 빠르게 전국적인 명성을 얻어 미국 전역 230여 개의 전시에 출품했습니다. 1962년, 코리타 수녀는 라 시에네가(La Cienega)에 있는 페루스 갤러리(Ferus Gallery)에서 앤디 워홀(Andy Warhol)의 첫 개인전 캠벨 수프 캔(Campbell's Soup Cans)을 관람했습니다. 당시 부흥하던 팝아트 운동에서 영향을 받은 코리타 수녀의 작품은 1960년대 베트남전 반대 시위부터 사회 정의와 여성 인권에 이르는 다양한 주제를 아우르면서 점차 정치적인 색이 더해졌습니다.
LA 대교구, 특히 제임스 매킨타이어(James McIntyre) 추기경과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코리타 켄트는 수도 생활을 그만두고 보스턴으로 이주하기로 합니다. 그녀는 생애 마지막까지 예술 창작에 전념했으며, 특히 1985년에 미국 우정국에서 발행해 7억 개 이상을 판매한 ‘사랑(Love)’ 우표가 대표적입니다. 198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코리타 켄트는 800여 점의 실크 스크린 작품과 수천 점의 수채화, 수많은 공공 및 민간 커미션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도로시 버펌 챈들러(Dorothy Buffum Chandler)
뮤직 센터(The Music Center)는 미국에서 가장 큰 예술 센터 중 하나로, 아맨슨 시어터(Ahmanson Theatre), 도로시 챈들러 파빌리온(Dorothy Chandler Pavilion), 마크 테이퍼 포럼(Mark Taper Forum), 월트 디즈니 콘서트 홀(Walt Disney Concert Hall) 등 화려한 극장을 보유하고 있는 곳입니다.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LA Phil), 로스앤젤레스 오페라단(LA Opera), 센터 시어터 그룹(Center Theatre Group), 로저 와그너 합창단(the Los Angeles Master Chorale) 등 저명한 회사들의 본거지이기도 합니다. 이 센터는 또한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는 글로리아 코프먼 프리젠츠 댄스 앳 더 뮤직 센터(Glorya Kaufman Presents Dance at The Music Center)로도 유명합니다.
도로시 챈들러 파빌리온은 로스앤젤레스 타임(Los Angeles Times)지 사장 노먼 챈들러(Norman Chandler)의 아내 도로시 버펌 챈들러 부인의 이름을 따 지어졌습니다. 예술계의 전설적인 거장인 챈들러 부인은 1951년 자선 콘서트 ‘볼을 구하라’(Save the Bowl)를 열어 재정난으로 파산할 위기에 처한 할리우드 볼(Hollywood Bowl)을 성공적으로 회생시킨 업적으로 칭송받고 있습니다. 이어 1955년부터는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본부 건축을 위한 자금을 조달하고자 약 2천만 달러(약 320억 원) 규모의 기금을 모았습니다. 1964년 12월 6일 도로시 챈들러 파빌리온 개관식에서는 28세 지휘자 즈빈 메타(Zubin Mehta)의 지휘 하에 역사상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로 꼽히는 야샤 하이페츠(Jascha Heifetz)가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연주회에서 연주를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1964년 12월 18일 타임(Time)지는 챈들러 부인을 표지 모델으로 선정하고, “미국 여성계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모금 활동을 진행하고 진정한 모범적인 시민성이 무엇인지 보여준 인물”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아맨슨 시어터와 마크 테이퍼 포럼은 1967년 4월에 개관했으며, 2003년 개관한 월트 디즈니 콘서트 홀은 챈들러 부인이 기획에 직접 참여해 탄생한 결과물입니다. 비록 챈들러 부인은 1997년 세상을 등지고 말았지만, 부인이 남긴 문화 유산은 로스앤젤레스의 후손들에게 오래도록 빛을 쬐어줄 것입니다.
이디스 헤드
이디스 헤드
샌버너디노에서 이디스 클레어 포스너라는 태명을 갖고 태어난 이디스 헤드(Edith Head)는 영화사에서 가장 위대한 의상 디자이너로 명망이 높습니다. 이디스는 할리우드 여자학교(Hollywood School for Girls)에서 스페인어 교사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예술 명문인 웨스틀레이크의 취나드 예술학교(Chouinard Art Institute)를 다니던 중 패러마운트 픽처스에 의상 스케치 아티스트로 발탁되어 43년간 그곳에서 근무한 이후, 1967년 유니버설 픽처스(Universal Pictures)로 이직하게 됩니다.
이디스는 무성영화 시절부터 활약하여 1930년대에는 할리우드에서 손에 꼽힐 수준의 디자이너가 되었습니다. 1938년에는 주요 할리우드 영화 스튜디오에서 의상부서의 장을 맡은 최초의 여성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허리케인’(1937년 작) 도로시 라무어의 사롱(sarong, 허리에 둘러 입는 천옷)과 ‘레이디 인 더 다크’(1944년 작)의 진저 로저스가 입은 밍크 금박 가운을 디자인하여 관객의 호평을 받았습니다.
이디스는 그 외에도 여러 의상의 공동 디자인에 참여하여 바브라 스탠윅(영화 ‘이중 배상’, 1944년 작), 베티 데이비스(영화 ‘이브의 모든 것’, 1950),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영화 ‘사랑아 나는 통곡한다’, 1949년 작), 글로리아 스완슨(영화 ‘선셋 대로’, 1950년 작), 엘리자베스 테일러(영화 ‘젊은이의 양지’, 1951년 작) 등 1940년대와 1950년대 당시 최고 여배우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영화 ‘로마의 휴일’(1953년 작)과 ‘사브리나’(1954년 작)에 출연한 오드리 헵번의 의상으로 오스카 의상상을 받았습니다.
또한, 그녀는 ‘오명’(1946년 작)의 잉그리드 버그만, ‘이창’(1954년 작)과 ‘나는 결백하다’(1955년 작)의 그레이스 켈리, ‘나는 비밀을 알고 있다’(1956년 작)의 도리스 데이, ‘현기증’(1958년 작)의 킴 노백, ‘새’(1963년 작)의 티피 헤드런 등 여러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 작품에 출연한 배우들의 의상도 디자인했습니다.
이디스는 1949년 아카데미 시상식에 의상상이 신설된 이래 1966년부터 매년 의상상 후보로 지명되었으며, 총 35개의 오스카상 후보로 지명되어 ‘사랑아 나는 통곡한다’(1949년 작)부터 ‘스팅’(1973년 작)까지 8개의 상을 받았습니다. ‘스팅’은 또한 영화상을 포함하여 7개의 상을 받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이디스의 독특한 스타일에 착안하여 디즈니/픽사가 제작한 ‘인크레더블’과 ‘인크레더블 2’에서 ‘수퍼스’ 의상을 디자인한 등장인물인 에드나 모드(“망토는 안 돼!”)가 탄생하기도 했습니다.
엘리자베스 스턴 박사(Dr. Elizabeth Stern)
캐나다에서 나고 자란 엘리자베스 스턴 박사는 1924년 굿 새머리탄 병원(Good Samaritan Hospital)과 체더스 오브 레바논 병원(Cedars of Lebanon Hospital)에서 레지턴트 근무를 시작하여 198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로스앤젤레스에 살았습니다. 스턴 박사는 로스앤젤레스에 머무는 동안 자궁경부암 연구에 집중하여 암의 진척과 원인을 밝혀내는 데 큰 공헌을 했으며, 자궁경부암이 시간이 지나면서 어떻게 발현되는지를 밝혀낸 장본인입니다. 1963년 UCLA 공공 보건 대학(UCLA Fielding School of Public Health)에 입학한 뒤에는 단순 포진과 자궁경부암의 관계를 밝히는 논물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그 뒤에는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지역 여성들을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해 구강 피임법과 자궁경부암의 관계를 밝혀냈습니다. 스턴 박사의 공헌으로 오늘날에는 자궁경부암을 조기에 진단하고 치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에스더 웡(Esther Wong)
‘펑크의 대모’ 에스더 웡은 상하이에서 태어나 1949년 공산주의가 중국을 점령하자 이를 피해 미국에 이민했습니다. 20년 동안 해운회사에서 사무원으로 일하던 에스더는 남편 조지와 함께 차이나타운 센트럴 플라자(Central Plaza)에 폴리네시아를 테마로 한 마담 웡스(Madame Wong’s)를 열었습니다.
음반 기획자 지망생이던, 자칭 ‘부랑자’ 폴 그린스타인(Paul Greenstein)이 웡 부부를 찾아왔을 때 사업은 부진했습니다. 그린스타인은 1978년 가을, 당시에는 생소했던 언더그라운드 장르였던 펑크 음악을 하는 밴드의 공연을 잡아 달라고 웡 부부를 설득했습니다. 화요일 밤 공연은 펑크 씬에서 유명해졌고 덕분에 레스토랑 사업이 급성장했지만, 음악적 방향에 대한 견해 차이로 그린스타인은 퇴출당했습니다. 펑크 나이트의 성공에 힘입어 웡 부부는 산타 모니카에 더 큰 공간을 얻어 마담 웡스 웨스트(Madame Wong's West)라는 이름으로 두 번째 공연장을 열었습니다. 에스더 웡이 직접 공연 스케줄을 관리하며 뉴웨이브 밴드와 펑크 팬보다 덜 소란스러운 관객을 대상으로 영업을 시작했습니다. 펑크 팬들은 마담 웡스에서 거절당한 밴드들을 받아주는 인근 홍콩 카페(Hong Kong Café)로 몰려들었습니다. 이 라이벌 구도는 <아트바운드(Artbound)> 14시즌의 에피소드 ‘차이나타운 펑크 전쟁(Chinatown Punk Wars)’의 주제가 되었습니다.
에스더 웡의 공연장 무대에 오른 유명 밴드로는 디 앨리 캣츠(The Alley Cats), 더 뱅스(The Bangs), 블랙 플래그(Black Flag), 캔디(Candy), 대니얼 아모스(Daniel Amos), 피어(Fear), 피시본(Fishbone), 고고스(The Go-Go's), 건즈 앤 로지스(Guns N' Roses), 더 낵(The Knack), 로스 일리걸스(Los Illegals), 로스 로보스(Los Lobos), 더 멤버스(The Members), 모텔스(The Motels), 오잉고 보잉고(Oingo Boingo), 폴리스(The Police), 라몬즈(Ramones), 레드 핫 칠리 페퍼스(Red Hot Chili Peppers)와 X(엑스)가 있습니다. 원조 마담 웡스는 1985년 화재로 문을 닫았고, 2층 공간은 현재 개인 주택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마담 웡스 웨스트는 1991년에 운영을 종료했습니다.
에타 제임스(Etta James)
사우스 LA에서 태어나고 자란 제임세타 호킨스(Jamesetta Hawkins)는 블루스, R&B, 소울, 재즈, 가스펠, 로큰롤을 아우르는 전설적인 목소리의 주인공, 에타 제임스로 전 세계에 알려져 있습니다. 5살 때 세인트 폴 침례 교회(St. Paul Baptist Church) 성가대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에타 제임스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솔로로 활동하게 됩니다. 10대 시절 그녀는 크레올레츠(Creolettes)라는 걸 그룹을 결성했다가 피치스(Peaches)로 이름을 바꾸었고, 1955년 싱글 ‘The Wallflower(월플라워)’로 빌보드 핫 리듬 앤드 블루스 트랙 차트 1위를 차지하며, 리틀 리처드(Little Richard)의 전국 투어 오프닝 무대에 섭니다.
피치스 이후 에타 제임스는 시카고의 유명 레이블 체스 레코드(Chess Records)와 계약하고 1960년에 데뷔 앨범 <At Last!(마침내!)>를 발매합니다. 이 앨범에는 글렌 밀러(Glenn Miller)의 곡을 커버한 그녀의 대표곡 ‘At Last(마침내)’와 ‘Stormy Weather(스토미 웨더)’, ‘A Sunday Kind of Love(일요일 같은 사랑)’ 같은 정통 재즈곡, 윌리 딕슨(Willie Dixon)의 블루스 명곡 ‘I Just Want to Make Love to You(아이 저스트 원트 투 메이크 러브 투 유)’ 등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롤링 스톤(Rolling Stone)>은 500대 명반을 선정하며 <At Last!>는 191위로 꼽았습니다. “에타 제임스는 이 매혹적인 LP에서 불꽃 같은 연주자로 꽃을 피웠습니다.” 올뮤직(AllMusic)의 스티븐 쿡(Stephen Cook)은 별 다섯 개를 준 리뷰에서 “블루스, R&B, 정통 재즈를 아우르는 다양한 곡과 에타 제임스의 전성기 시절 스윙을 들을 수 있다”라고 썼습니다.
그녀는 이후에도 여러 장의 앨범과 차트에 오른 히트 싱글을 더 발표했지만, ‘At Last!’에 쏟아진 비평가의 찬사와 상업적 인기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1967년에 발표한 ‘I'd Rather Go Blind(차라리 내 눈이 멀었으면)’ 또한 에타 제임스의 히트곡으로 블루스 클래식으로 자리 잡으며 비비 킹, 로드 스튜어트, 비욘세 등이 커버했습니다.
그녀는 몽트뢰 재즈 페스티벌(Montreux Jazz Festival)에서 공연하고, 1978년 롤링 스톤즈 투어의 오프닝 무대에 서는 등 인기를 얻었습니다. 키스 리처즈(Keith Richards)는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에타 제임스는 나의 소울메이트였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녹음 작업이 길어져 공백이 있던 시기에 에타 제임스는 1984년 LA 하계 올림픽 개막식에서 ‘When the Saints Go Marching In(성인들이 행진할 때)’을 부르기도 하고, 1987년 다큐멘터리 <로큰롤 만세!(Hail! Hail! Rock 'n' Roll)>에서 척 베리(Chuck Berry)와 듀엣으로 로큰롤 음악을 연주하기도 했습니다.
1988년에 컴백 앨범 <Seven Year Itch(7년만의 외출)>를 발표했고, 1994년에는 <Mystery Lady: Songs of Billie Holiday(미스터리 레이디: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로 첫 그래미상(최우수 재즈 보컬 앨범)을 받았습니다. 그녀의 마지막 두 앨범인 <Let's Roll(렛츠 롤)>과 <Blues to the Bone(블루스 투 더 본)>은 각각 최우수 컨템포러리 블루스 앨범과 최우수 트래디셔널 블루스 앨범 부문에서 그래미상을 거머쥐었습니다. 에타 제임스는 1993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 Rock and Roll Hall of Fame)에 헌액되었고, 2003년에는 그래미 평생 공로상을 받았습니다.
헬렌 리우 퐁(Helen Liu Fong)
로스앤젤레스에서 시작되고 유행한 구기 건축 양식(Googie architecture)은 자동차 문화가 깃들어 있는 도로변의 건물들과 표지판들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건축 양식의 중심에는 헬렌 리우 퐁이 있었습니다. 차이나타운에서 출생한 퐁 여사는 20세기 중반의 독특한 다이너(diner) 디자인을 탄생시킨 아멧 앤 데이비스(Armet & Davis)에서 근무하며 라 시에네가(La Cienega)의 놈스(Norms) 식당, 웨스트체스터(Westchester)의 팬스(Pann's), 그리고 미라클 마일(Miracle Mile)의 조니스(Johnie's)의 디자인 프로젝트를 담당했습니다. 윌셔(Wilshire) 대로와 페어팩스(Fairfax) 가 사이에 있는 조니스는 과거에는 카페였던 식당으로, 위대한 레보스키(The Big Lebowski), 저수지의 개들(Reservoir Dogs) 등 유명한 영화를 촬영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헤디 라마(Hedy Lamarr)
할리우드의 황금기 중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라는 평을 받은 헤디 라마는 오스트리아에서 나치군을 피해 미국에 온 이민자로, 런던(London)에서 MGM 스튜디오(MGM studio) 회장 루이스 메이어(Louis B. Mayer)와 영화 출연 계약을 하면서 배우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녀는 알지어즈(Algiers)에서 수준급의 연기를 보였으며며 지크펠드 걸(Ziegfield Girl), 화이트 카고(White Cargo), 삼손과 데릴라(Samson and Delilah) 등의 히트작들에도 출연했습니다. 그녀는 또 월트 디즈니(Walt Disney's)사의 백설 공주(Snow White) 모델이었으며 코믹 시리즈 캣우먼(Catwoman)과 이후 영화 다크 나이트 라이즈(The Dark Knight Rises)에서 앤 해서웨이(Anne Hathaway)의 등장인물인 캣우먼의 시초격이 된 인물이었습니다.
라마는 시대를 관통하는 미모와 고전 영화에서의 명연기뿐 아니라 작곡가 조지 앙세일(George Antheil)과 함께 개발한 주파수 도약 기법(frequency hopping technology)으로도 명망이 높습니다. 나치군이 연합군의 어뢰를 고장내지 못하게 하기 위해 고안된 이 기술은 1960년대에 되어서야 미 해군에서 채택되었습니다. 이들은 이후 Wi-Fi, GPS, 블루투스(Bluetooth) 보안 기술의 기초를 제공한 공적을 인정받아 사후인 2014년 미국 발명가 명예의 전당(National Inventors Hall of Fame)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영화상을 수상한 2017년 다큐멘터리 봄셸: 헤디 라마의 일생(Bombshell: The Hedy Lamarr Story)에서는 그녀의 놀라운 삶과 선구자적인 발명가로서의 면모를 엿볼 수 있습니다.
힐다 솔리스(Hilda L. Solis)
오랫동안 성공적으로 정치 생활을 지냈던,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지사 힐다 솔리스는 미국 상원의원이자, 버락 오바마 대통령 정부 당시 노동성 장관이 되어 최초의 라틴계 미국인 정부 관료였습니다. 저소득층과 소수자 사회의 환경 문제 분야에 앞장섰던 그녀는 1999년 캘리포니아에서 환경정의법을 통과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녀는 이러한 업적을 인정받아 2000년 존 케네디 프로필 용기 있는 인물상(John F. Kennedy Profile in Courage Award)을 수상했습니다.
아이다 루피노(Ida Lupino)
영국의 유명한 연기인 집안에서 태어난 아이다 루피노는 청소년기에 연기를 시작해 로스앤젤레스에 왔습니다. 루피노는 배우로서 193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다양한 작품에서 연기를 펼쳤지만, 카메라 뒤에서의 선구자적인 면모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여성 감독이 극도로 드물었던 영화계에서 그녀는 베니티 페어(Vanity Fair)에서 “미국 독립 영화의 어머니”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두각을 드러냈습니다. 1949년에는 영화 낫 원티드(Not Wanted)에서 첫 감독 역할을 해냈으나 크레딧에는 이름을 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뒤 느와르 장르인 히치하이커(The Hitch-Hiker)부터 청소년 코미디 트러블 위드 엔젤(The Trouble with Angels)까지 다양한 영화의 감독을 맡으며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렸습니다. 그녀는 방송계에서도 도나 리드 쇼(The Donna Reed Show), 앨프리드 히치콕 프리젠츠(Alfred Hitchcock Presents), 트와일라잇 존(The Twilight Zone) and 아내는 요술쟁이(Bewitched) 등의 고전 시리즈 감독을 맡으며 활약을 이어 갔습니다.
잔느 코르도바(Jeanne Córdova)
과거 수도를 하며 지내던 잔느 코르도바는 자신이 레즈비언임을 세상에 밝히고 1970년대 초 작가이자 활동가로서의 삶을 시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작가는 레즈비언 타이드(Lesbian Tide)라는 잡지사의 사장뿐 아니라 로스앤젤레스 프리 프레스(Los Angeles Free Press)의 평론가로도 활동했습니다. 그 뒤에는 커뮤니티 옐로우 페이지(Community Yellow Pages)를 설립해 동성애자인 사업주들을 지원하는 한편 계속해서 집필 활동을 이어 나갔습니다. 코르도바 작가의 작품은 애드보킷(The Advocate) 신문과 네이션(The Nation) 잡지 외에도 수많은 문집에 수록되었으며, 또한《When We Were Outlaws》를 포함해 3권의 책도 출판되었습니다. 작가는 2016년 로스 펠리즈(Los Feliz)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주얼 타이스 윌리엄스(Jewel Thais-Williams)
알링턴 하이츠(Arlington Heights) 내 코리아타운 변두리에 위치한 캐치 원은 일렉트로닉, 힙합, 인디 댄스, 메탈, 락까지 폭 넓은 장르의 음악이 있는 로스앤젤레스 최고의 나이트클럽 중 하나입니다. 본래 주얼스 캐치 원으로 알려져 있던 이 클럽은 1973년 미국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을 위한 게이와 레즈비언들을 위한 디스코 클럽으로 개장한 곳입니다. 40년의 전성기 동안 주얼 타이스 윌리엄스 여사는 릭 제임스(Rick James)와 마돈나(Madonna)부터 디스코 퀸이라 불렸던 실베스터 제임스 주니어(Sylvester James Jr.)까지 수많은 유명인이 방문했습니다. 이러한 성소수자를 위한 공헌을 기려 윌리엄스 여사는 2016년 웨스트 할리우드(West Hollywood)에서 열린 로스앤젤레스 프라이드 퍼레이드 축제(LA Pride Parade & Festival)에서 리더로 선발되었습니다.
조디 포스터(Jodie Foster)
아역 스타에서 오스카상 수상에 이르기까지 조디 포스터는 60년에 이르는 화려한 경력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습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나고 자란 조디 포스터는 세 살 때 코퍼톤(Coppertone) TV 광고로 데뷔했습니다. 1960년대, 1970년대에 수많은 TV 프로그램과 <프리키 프라이데이(Freaky Friday)> 같은 디즈니 영화에 출연했습니다. 1974년에는 마틴 스코세이지(Martin Scorsese) 감독의 <엘리스는 이제 여기 살지 않는다(Alice Doesn't Live Here Anymore)>에서 조연으로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스코세이지 감독은 차기작이었던 <택시 드라이버(Taxi Driver)>(1976)에서 그녀를 십 대 초반의 매춘부 아이리스 역에 캐스팅했습니다. 조디 포스터는 이 영화로 아카데미상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고, 영국 아카데미 영화상(BAFTA) 여우조연상과 신인상을 받았습니다. 그해 말에는 앨런 파커(Alan Parker) 감독의 영화 <벅시 말론(Bugsy Malone)>로 영국 아카데미 영화상을 다시 한번 수상했습니다.
1985년, 예일 대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한 조디 포스터는 성인 영화 배우로 전향합니다. 영화 <피고인(The Accused)>(1988)에서 강간 피해자를 연기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완성된 성인 연기자로 거듭났습니다. <양들의 침묵(The Silence of the Lambs)>(1991)에서는 연쇄 살인범 한니발 렉터 역의 앤서니 홉킨스(Anthony Hopkins) 경의 상대로 FBI 훈련생 클라리스 스탈링을 연기하며 다시 한번 아카데미상을 거머쥐었습니다. 이 영화는 앤서니 홉킨스와 조디 포스터의 아카데미상을 비롯해 작품상, 감독상(조너선 드미), 각색상(테드 탤리)까지 휩쓸었습니다.
2000년대 들어서 조디 포스터는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패닉 룸(Panic Room)>(2002), 스파이크 리 감독의 <인사이드 맨(Inside Man)>(2006),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대학살의 신(Carnage)>(2011) 등 비평과 흥행에 성공한 작품에 출연하여 골든 글로브 여우주연상을 받았습니다. 제70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는 세실 B. 드밀 상(Cecil B. DeMille Award)을, <모리타니안(Mauritanian)>(2021)으로 골든 글로브 여우조연상을 수상했습니다.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나이애드의 다섯 번째 파도(Nyad)>(2023)로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으며, <트루 디텍티브: 나이트 컨트리(True Detective: Night Country)>에서 리즈 댄버스 서장을 연기해 호평을 받았습니다.
조니 미첼(Joni Mitchell)
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싱어송라이터로 손꼽히는 조니 미첼은 캐나다 앨버타에서 태어났습니다. 작은 클럽에서 노래를 부르며 커리어를 쌓다가 22세에 미국으로 이주하고 투어를 시작했습니다. 플로리다의 한 나이트클럽에서 그녀의 공연을 본 데이비드 크로스비(David Crosby)는 그녀를 로스앤젤레스로 불러 1968년 데뷔 앨범 <Song to a Seagull(송 투 시걸)>을 녹음합니다. 1969년부터 1974년까지 조니 미첼은 로렐 캐년(Laurel Canyon)에서 짐 모리슨(Jim Morrison)와 프랭크 자파(Frank Zappa), 마마스 앤 파파스(The Mamas & The Papas), 버즈(The Byrds)의 멤버, 크로스비, 스틸스 앤 내시(Crosby, Stills & Nash) 등 록의 전설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1971년, 미첼은 <롤링 스톤>의 2020년판 500대 명반 목록에서 3위를 차지한, 획기적인 앨범 <Blue(블루)>를 녹음했습니다. <뉴욕 타임스>는 “20세기 대중음악의 전환점이자 정점”을 대표하는 25대 앨범에 <Blue>를 선정했고, NPR(내셔널 퍼블릭 라디오)은 2017년, 위대한 여성 음악가 앨범 목록 1위로 <Blue> 앨범을 선정했습니다.
1997년, 그녀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등 수많은 영예를 안았습니다. 조니 미첼은 1969년에 첫 그래미상을 받고, 2002년에는 평생 공로상을, 그리고 조니 미첼이 처음으로 그래미 시상식에서 공연을 선보인 2024년 시상식에서 최우수 포크 앨범상을 받는 등 총 열한 번의 그래미상을 받았습니다. 2024년 공연은 2015년에 뇌동맥류를 앓고 난 뒤 무대에 복귀하는 영광스러운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2018년 11월에는 도로시 챈들러 파빌리온(Dorothy Chandler Pavillion)에서 열린 헌정 콘서트에 참석했고 이듬해 3월, <Joni 75: A Birthday Celebration(조니 미첼 탄생 75주년 기념)> 헌정 앨범이 발매됐습니다. 2024년 10월 19일과 20일, 할리우드 볼(Hollywood Bowl)에서 열리는 조니 미첼과 조니 잼(Joni Mitchell & The Joni Jam) 공연은 2000년 이후 LA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헤드라이닝 콘서트입니다.
캐런 배스(Karen Bass)
로스앤젤레스에서 나고 자란 캐런 배스는 제43대 로스앤젤레스 시장으로, 최초의 여성 시장이자 톰 브래들리(Tom Bradley) 시장에 이어 두 번째로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서 시장직을 수행한 인물입니다. 캐런 배스는 알렉산더 해밀턴 고등학교(Alexander Hamilton High School), 캘리포니아 주립대 도밍게즈 힐스(Cal State Dominguez Hills)와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USC)를 졸업했습니다. 2004년에 캘리포니아 47지구의 하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는데, 당시 그녀는 주 의회에서 활동하는 유일한 흑인 여성이었습니다. 배스는 제67대 캘리포니아 주 의회 의장(2008년 5월~2010년 3월), 미국 하원 의원(2011년 1월~2022년 12월), 제26대 의회 블랙 코커스 의장(2019년 1월~ 2021년 1월)을 역임했습니다. 2022년 12월 10일, 시장에 공식 취임했고 다음 날 카말라 해리스(Kamala Harris) 부통령이 취임 선서를 주재했습니다.
릴리언 디즈니(Lillian Disney)
잉크 화가였던 릴리언 디즈니는 1925년에 월트 디즈니와 결혼해 1966년 사망할 때까지 결혼 생활을 이어갔습니다.릴리언은 남편이 사랑했던 만화 캐릭터, 미키 마우스의 이름을 지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1928년, 뉴욕에서 캘리포니아로 기차 여행을 하던 중 월트 디즈니는 아내에게 ‘모티머 마우스(Mortimer Mouse)’ 그림을 보여주었고, 그녀는 그 이름이 ‘너무 우울하게 들린다’며 모티머 대신 ‘미키 마우스(Mickey Mouse)’라는 이름을 제안했습니다.
1987년, 릴리언은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Walt Disney Concert Hall) 건축을 위해 5천만 달러를 기부했죠. 프랭크 게리(Frank Gehry)가 설계한 이 건축물은 릴리언이 사망하고 6년이 지난 2003년에 문을 열었습니다. 블루 리본 가든(Blue Ribbon Garden)은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에 숨겨진 옥상 정원입니다. 이 옥상 정원의 하이라이트는 릴리언과 로열 델프트(Royal Delft) 도자기 꽃병과 장미에 대한 그녀의 사랑을 기리기 위해 프랭크 게리가 설계한 분수, ‘로즈 포 릴리(A Rose for Lilly)’입니다. 릴리언은 1971년에 개교한 캘리포니아 예술대학교(California Institute of the Arts), 일명 칼아츠(CalArts))의 설립 기금 조달을 지원했으며, 칼아츠는 팀 버튼(Tim Burton), 돈 치들(Don Cheadle), 소피아 코폴라(Sofia Coppola), 아카데미상을 받은 픽사 애니메이터 등 수많은 유명 동문을 배출했습니다.
리사 레슬리(Lisa Leslie)
리사 레슬리는 1997년 미국 여자 프로 농구 협회(Women’s National Basketball Association; WNBA)가 설립되어 로스앤젤레스 스파크스(Los Angeles Sparks) 팀의 첫 선수가 된 농구 선수입니다. 로스앤젤레스 사우스베이(South Bay)의 가데나(Gardena)시에서 태어난 그녀는 잉글우드(Inglewood)의 모닝사이드 고교(Morningside High School)에서 캘리포니아주 대표 선수로 있을 때부터 호평을 받아 왔습니다. 그녀는 그 뒤 USC 트로잔스(USC Trojans) 팀에서 활동하고 애틀랜타 하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수상한 뒤 WNBA 리그에 진입했습니다. 스파크스 팀에 있는 동안 레슬리는 2회의 챔피언십과 3회 최우수선수상 수상이라는 업적을 이루었고, 2002년에는 WNBA 리그 경기 최초로 덩크슛을 성공시킨 선수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2009년 36세의 나이로 은퇴했으며 그 다음 해에는 배정된 등번호도 다른 선수에게 넘겨 주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스파크스 팀의 소유권 중 일부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루실 볼(Lucille Ball)
뉴욕 제임스타운에서 태어난 루실 볼은 연예인이 되기 위해 할리우드로 이주했습니다. RKO의 계약직 배우였던 그녀는 1930년대에 단편 영화 <스리 스투지스( Three Stooges)>부터 마르크스 형제(Marx Brothers)의 <룸 서비스(Room Service)>, 아스테어와 로저스(Astaire-Rogers)의 고전 영화 <톱 햇(Top Hat)> 등 수많은 작품에 단역으로 출연했습니다. 1940년, 루실 볼은 뮤지컬 영화 <투 매니 걸스(Too Many Girls)>에서 쿠바 출신의 밴드 리더 데시 아르나즈(Desi Arnaz)를 만나 사랑에 빠졌고, 영화 개봉 두 달 후, 둘은 열애를 시작했습니다. 1940년대에 그녀는 MGM과 계약했지만 메이저 스타덤에는 오르지는 못했고 ‘B급 영화계의 여왕(Queen of the B)’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당대의 여러 스타들처럼 루실 볼도 추가 수입과 미디어 노출을 위해 라디오 일을 시작했습니다. 1948년 7월, CBS 라디오의 코미디 스페셜 <마이 페이버릿 허즈번드(My Favorite Husband)>에 괴짜 주부 역으로 캐스팅됐습니다. 이 스페셜 프로그램의 성공은 라디오 시리즈로 이어졌고, 리처드 데닝(Richard Denning)이 루실 볼의 남편 역할을 연기했습니다. CBS는 루실 볼과 리처드 데닝이 출연하는 TV 버전의 쇼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싶었지만, 그녀는 실제 남편인 데시 아르나즈가 남편 역을 맡지 않는다면 출연하지 않겠다며 거절했습니다. CBS 경영진은 인종이 다른 부부의 캐스팅을 주저했고, 이에 부부는 제작사 데실루(Desilu)를 설립한 다음, 순회공연을 진행하며 자신들의 컨셉이 통할 것이라고 방송사를 설득했습니다.
<왈가닥 루시(I Love Lucy)>는 1951년 10월 15일, CBS에서 첫 방영을 시작해 6시즌까지 이어졌습니다. 비비안 밴스(Vivian Vance)와 윌리엄 프롤리(William Frawley)가 주연을 맡은 <왈가닥 루시>는 앙상블 캐스트가 등장하는 최초의 쇼이자 대본을 가지고 스튜디오 관객 앞에서 35mm 필름으로 촬영한 최초의 TV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이 시리즈의 촬영 감독은 <메트로폴리스(Metropolis)>(1927)와 <드라큘라(Dracula)>(1931) 같은 고전 영화에서 촬영을 맡았던, 아카데미상 수상 경력에 빛나는 칼 프로인트(Karl Freund)였습니다.
에미상(Emmy Awards) 5개 부문을 수상한 <왈가닥 루시>는 총 6개 시즌 중 4개 시즌이미국에서 가장 많이 시청한 쇼이자 닐슨(Nielsen) TV 시청률 1위로 방영을 종료한 최초의 프로그램이기도 합니다. 2시즌 에피소드 ‘루시, 병원에 가다(Lucy Goes to the Hospital)’에서 루실 볼이 리틀 리키를 출산하는 장면은 역대 가장 많은 사람이 시청한 TV 장면으로, 당시 최고 시청률인 71.7%를 기록했습니다. 이는 TV를 보유한 전체 가구의 71.7%에 해당하는 약 4,400만 명이 프로그램을 시청했다는 뜻입니다. 2012년 ABC 뉴스(ABC News)와 <피플(People)>지에서 실시한 설문 조사에서 <왈가닥 루시>는 ‘역대 최고의 TV 쇼’로 뽑혔습니다.
1960년, 아르나즈와 이혼한 루실 볼은 아르나즈의 데실루 지분을 매입해 메이저 스튜디오를 이끄는 최초의 여성이 되었습니다. 데실루는 <왈가닥 루시>를 비롯해 <스타트렉: 오리지널 시리즈(Star Trek TOS)>, <제5전선(Mission: Impossible)>, <언터처블(Untouchables)> 등 고전 TV 시리즈를 제작했습니다. 루실 볼은 데실루의 지분을 1,700만 달러(현재 가치로 약 1억 4,900만 달러)에 걸프+웨스턴(Gulf+Western)에 매각하고 파라마운트 텔레비전(Paramount Television)으로 사명을 변경했습니다.
2020년 3월, 루실 볼은 지난 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들을 선정하는 타임지의 올해의 여성 100인(100 Women of the Year)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1960년에는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2개의 별이 새겨졌고, 1986년에는 케네디 센터(Kennedy Center) 공로상 수상, 1989년에는 사망 후에 대통령 자유 훈장을 받았으며, 2011년 8월 6일에는 루실 볼의 탄생 90주년을 맞아 USPS 기념 우표가 발행되는 등 수많은 영예를 안았습니다.
매릴린 먼로(Marilyn Monroe)
노마 진 모텐슨(Norma Jeane Mortenson)은 1926년 6월 1일,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났습니다. 오늘날 매릴린 먼로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배우는 1950년대와 1960년대 초, 최고의 영화배우 반열에 올랐지만 36세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했습니다. 먼로는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Gentlemen Prefer Blondes)>, <백만장자와 결혼하는 법(How to Marry a Millionaire)>, <7년 만의 외출(The Seven Year Itch)>, <뜨거운 것이 좋아(Some Like It Hot)> 등 고전 영화에서 코믹한 연기를 펼친 것으로 유명합니다. 정형화된 연기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그녀는 액터스 스튜디오(Actors Studio)에서 공부했고, <버스 정류장(Bus Stop)>에서 드라마틱한 연기 변신으로 평단의 찬사를 받으며 골든 글로브상 후보에 올랐습니다.
공식적으로는 ‘자살로 추정’되는 논란의 죽음 이후 수십 년 동안, 매릴린 먼로는 전설적인 영화배우이자 세계적인 섹스 심볼, 대중문화 아이콘으로 기억됐습니다. 2020년 3월, 먼로는 지난 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들을 선정하는 타임지의 올해의 여성 100인(100 Women of the Year)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매릴린 먼로가 즐겨 찾던 호텔과 레스토랑부터 세계 최고의 먼로 기념품 컬렉션까지, 매릴린 먼로의 영원한 유산을 만나 볼 수 있는 로스앤젤레스 명소를 소개합니다.
메리 픽포드(Mary Pickford)
미국의 연인(America's Sweetheart), 영화계의 여왕(Queen of the Movies), 곱슬머리의 여인(girl with the curls)이라는 별명을 지닌 메리 픽포드는 할리우드의 황금기 시절 최고의 스타 중 하나였습니다. 픽포드 여사는 52편의 영화에 출연하였으며 순진한 여성상의 전형이 된 인물으로 꼽힙니다. 여사는 아카데미 시상식(Academy Award)에서 유성 영화 코켓(Coquette, 1929)으로 역대 두 번째의 최고의 여배우상을 수상하고 1976년에는 명예 오스카(Oscar)상을 받았습니다. 또 아카데미(Academy of Motion Picture Arts and Sciences)와 영화 구호 기금(Motion Picture Relief Fund)을 설립하는 데 일조했습니다.
픽포드 여사의 업적은 영화 배우로서 끝나지 않습니다. 여사는 영화 스튜디오를 무려 두 곳이나 공동 창립했으며, 그 첫 번째가 바로 픽포드 페어뱅스 스튜디오(Pickford-Fairbanks Studio)로 오늘날 로트(The Lot)로 알려진 곳입니다. 그리고 1919년에는 찰리 채플린(Charlie Chaplin), 데이비드 와크 그리피스(D. W. Griffith), 더글러스 페어뱅스(Douglas Fairbanks)와 더불어 유나이티드 아티스츠(United Artists) 스튜디오를 공동 창립했습니다. 픽포드 여사는 지금의 에이스 호텔 극장(The Theatre at Ace Hotel)이 된 영화관 디자인에 영감을 준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1930년 연기계에서 물러나기 전까지 유나이티드 아티스츠에서 영화를 제작했습니다. 픽포드 여사는 1979년 별세하였으나, 여사의 이름을 딴 메리 픽포드 재단(Mary Pickford Foundation)은 그 뜻을 이어받아 자선 활동을 계속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녀의 업적을 기려 TCL 차이니즈 시어터(TCL Chinese Theatre)명예의 거리에는 여사의 손자국과 발자국이 남겨져 있으며, 여사의 이름을 딴 할리우드의 픽포드 영화 연구 센터(The Pickford Center for Motion Picture Study)와 의회 도서관(Library of Congress)의 메리 픽포드(Mary Pickford Theater)이 생겼습니다.
미스티 코플랜드(Misty Copeland)
미스티 코플랜드는 13세가 되어서야 발레를 시작했지만, 그녀의 재능은 의심할 여지 없이 출중했습니다. 그녀는 청소년기에 산피드로 발레 학교(San Pedro Ballet School)에 입교해 발레 실력을 갈고 닦았습니다. 오늘날에는 영예로운 발레리나를 기념하고자 학교 옆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으며, 근방의 교차로도 그녀의 이름을 따서 명칭이 지어졌습니다. 2015년에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최초로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American Ballet Theatre)의 수석 무용수로 선정되었습니다. 주연을 맡았던 무용 공연으로는 백조의 호수(Swan Lake)와 파이어버드(Firebird)가 있습니다.
낸시 실버튼
유명 셰프이자 제빵사인 낸시 실버튼(Nancy Silverton)은 LA 요식업계에 큰 파문을 불러온 인물일 뿐만 아니라, 미국 전역에 사워도우(sourdough)와 아티산 브레드(artisan bread)를 전파한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샌퍼낸도 밸리에서 태어난 낸시는 소노마 주립대학에 정치공학 전공으로 입학했지만 셰프가 되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고’ 자퇴했다고 합니다. 런던에서 Le Cordon Bleu를 졸업한 뒤 worked at 마이클스(Michael's)에서 근무하며 경력을 쌓고 1982년에는 볼프강 퍽스 스파고(Wolfgang Puck's Spago)의 첫 파티시에가 되었습니다. 낸시는 1986년에 그녀의 요리서인 ‘Desserts’를 집필하고,
1989년에 당시 남편이었던 마그 필과 라브레아에 캄파닐레(Campanile)를 차렸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조너선 골드는 LA타임스에서 “캄파닐레 레스토랑이 미국의 미식 문화에 기여한 바는 그 어떤 말로 표현해도 부족하다”라며 캄파닐레를 극찬했습니다. 캄파닐레를 개업하기 6개월 전 차린 라브레아 베이커리(La Brea Bakery)도 식당과 마찬가지로 문을 열자마자 문전성시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낸시는 1991년 제임스 비어드(James Beard) 뛰어난 페이스트리 셰프 상을 받고, 2006년 두 번째 요리서 ‘Nancy Silverton's Breads from the La Brea Bakery’를 발간했습니다. 낸시가 캄파닐레에서 진행했던 ‘그릴드 치즈 나이트’(Grilled Cheese Night)는 이후 세계적인 유행이 되었습니다.
그녀가 떠난 뒤 캄파닐레는 2012년 문을 닫았고, 지금은 리퍼블리크(Republique)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이후, 그녀는 2007년 피자리아 모짜(Pizzeria Mozza)와 오스테리아 모짜(Osteria Mozza)를 개업했습니다. 푸드앤와인(Food & Wine) 잡지에서 ‘육류 밀매점’이라고 소개한 모짜플렉스(Mozzaplex)는 치 스파카(Chi Spacca)의 2013년 개업과 함께 완공되었습니다. 낸시는 2014년 제임스 비어드 재단에서 수여하는 중 최고의 영예라 할 수 있는 뛰어난 셰프 상을 받았습니다. 그 다음 해에는 젤라토와 셔벗을 전문으로 하는 소규모 프랜차이즈 낸시스 팬시(Nancy's Fancy)를 출시했고,
최근 2020년에는 할리우드 루즈벨트에 더 배리시(The Barish)를 열었습니다. 20세기 초 캐나다 사스카츄완에서 가축을 기르던 낸시의 조상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 레스토랑은 고전 스테이크 하우스 요리와 오븐 파스타부터 테이블 서비스까지 할리우드의 황금 전성기를 연상케 하는 음식과 디자인을 갖추었습니다.
노마 메릭 스클라렉(Norma Merrick Sklarek)
건축계의 선구자 노마 메릭 스클라렉 선생의 작품은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Los Angeles International Airport; LAX) 제1터미널부터 퍼시픽 디자인 센터와 패션 디자인 상업 대학(the Fashion Institute of Design and Merchandising)까지 로스앤젤레스 곳곳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선생은 1962년 캘리포니아에서 건축가 면허를 취득한 최초의 흑인 여성이었으며 과거 뉴욕에서 근무하는 동안에도 뉴욕 면허를 취득한 바 있습니다. 스클라렉 선생은 건축계에서 진로를 추구하기 위해 힘든 길을 걸어 왔습니다. 2012년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지에 실린 부고 기사에는 건축계에서 감내해야 했던 인종차별과 성차별이 여실히 드러나 있습니다. 선생은 1980년대 중반 여성으로만 구성된 회사를 공동으로 창립했으며 미국 건축가 협회 대학(American Institute of Architecture College)에서 석학회원(fellow)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옥타비아 버틀러(Octavia E. Butler)
패서디나(Pasadena)에서 출생한 옥타비아 버틀러는 공상과학 소설의 선구자로 꼽히는 작가였으며, 휴고(Hugo)상과 (Nebula)상을 다수 수상했습니다. 작가는 1995년 공상과학 작가 중 처음으로 맥아서 펠로우십(MacArthur Fellowship)으로 선발되는 영예를 맞이했습니다. 전통적으로 백인이 지배적이었던 문학계에서 버틀러 작가는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페미니스트의 관점에서 서술된 서사를 통해 유리천장을 부쉈습니다. 작가는 또한 휴고상과 네뷸라상을 수상한 블러드차일드(Bloodchild, 1995)에서 임신한 남성의 이야기를, 그리고 와일드 시드(Wild Seed, 1980)에서 변신 능력과 성별 전환 능력이 있는, 불사의 아프리카인 도로(Doro)와 안야누(Anyanwu)의 이야기를 통해 젠더 정체성에 도전하기도 했습니다.
2006년 발행된 뉴욕 타임즈(The New York Times)지의 비보에서는 세계적으로 호평을 받은 버틀러 작가의 작품들에 대해 “인종, 성별, 권력을 넘어 궁극적으로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찰했다는 데 의의가 크다”고 평론했습니다. 그중 1979년 출판된 킨(Kindred)은 대표작으로 꼽히며 지금도 고등학교와 대학에서 교육되고 있는 작품입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아프리카계 미국인 다나(Dana)는 1976년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작가로, 어느 날 갑자기 전쟁이 발발하기 전의 메릴랜드(Maryland) 농장으로 시간 여행을 겪게 됩니다. 작가인 월터 모슬리(Walter Mosley)는 이 소설이 “진정한 공상과학계의 걸작”이라 평가했습니다. 2022년 1월에는 FX 방송국에서 소설 킨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다나 역에 말로리 존슨(Mallori Johnson)이 주연, 워치맨(Watchmen) 연출과 각본을 맡았던 브랜든 제이콥스 젠킨스(Branden Jacobs-Jenkins)이 총괄하는 8편의 시리즈물 제작을 발표했습니다.
버틀러 작가의 작품은 유언에 따라 헌팅턴 도서관(The Huntington Library)에 기증되었으며, 출판되지 않은 원고, 일기, 연구일지, 메모, 편지, 그외 소모품 등 8천 점이 넘는 소장품이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버틀러 작가는 사후, 2010년 공상과학 명예의 전당(Science Fiction Hall of Fame)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DTLA에 있는 중앙도서관(Central Library)에서는 2019년 DIY 창작자 공간이자 시청각 스튜디오인 옥타비아 랩(Octavia Lab)을 열었습니다.
NASA에서는 화성의 2020년 퍼시비어런스(Perseverance) 로버 착륙지 이름을 ‘옥타비아 E 버틀러 착륙장’이라 명명했습니다. 2022년 9월 옥타비아는 국립 여성 명예의 전당(National Women's Hall of Fame)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같은 달 패서디나의 워싱턴 STEAM 다국어 학원(Washington STEAM Multilingual Academy)도 옥타비아 E. 버틀러 매그닛(Octavia E. Butler Magnet)으로 개명했습니다.
2023년 2월에는 니키 하이가 모든 연령과 바탕을 지닌 이가 ‘BIPOC 작가들이 지은 책을 마음껏 둘러볼 수 있는’ 옥타비아의 서고(Octavia’s Bookshelf)를 열었습니다. LA타임스에서는 옥타비아의 서고를 “옥타비아가 살던 동네에 있어 그녀의 소설에서 풍부한 영감을 찾을 수 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루스 핸들러(Ruth Handler)
바비 인형을 만든 루스 핸들러(결혼 전 이름은 루스 모스코(Ruth Mosko))는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태어났습니다. 대학 2학년 여름, 루스 모스코는 파라마운트 스튜디오(Paramount Studio)에 일자리를 구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연인이었던 이지 핸들러(Izzy Handler)와 결혼하며 로스앤젤레스로 이사했고, 루스는 파라마운트로 돌아왔습니다. 이지는 엘리엇(Elliot)으로 개명한 뒤 조명 디자이너가 됐습니다.
핸들러 부부는 가구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45년 1월, 기업 간부였던 해롤드 ‘매트’ 맷슨(Harold ‘Matt’ Matson)이 합류하면서 사명을 마텔(Mattel)로 변경했습니다. 루스는 1945년부터 1975년까지 마텔의 초대 사장으로 재직했습니다. 건강 악화로 인해 맷슨은 1946년, 자신의 마텔 지분을 루스에게 매각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매출이 감소하자 마텔은 장난감 가구로 눈을 돌렸고, 결국 장난감 제조 산업으로 방향을 전환했습니다.
루스 핸들러는딸 바바라(Barbara)가 친구들과 종이 인형을 가지고 어른 역할극을 하며 노는 것을 보고 기회를 봤습니다. 그 당시 인형은 대부분 아기 모습이었고, 시중에 어른을 닮은 인형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1956년, 바바라와 아들 케네스(Kenneth)를 데리고 유럽을 여행하던 중 루스는 어른 모습을 한 인형 빌드 릴리(Bild Lilli)를 발견했습니다. 루스가 구상하던 것이 바로 그런 인형이었습니다.
빌드 릴리를 가지고 LA로 돌아온 핸들러는 디자이너 잭 라이언(Jack Ryan)과 함께 인형 디자인을 다시 했습니다. 그리고 딸의 이름을 따서 새 인형의 이름을 바비(Barbie)로 지었습니다. 바비는 1959년 3월 9일, 뉴욕에서 열린 미국 국제 완구 박람회(American International Toy Fair)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바비는 출시 첫해에만 30만 개 이상 판매될 정도로 즉각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후 마텔은 핸들러의 아들 이름을 따 켄(Ken)이라는 이름의 바비 남자 친구를 추가했습니다. 그 후 수십 년 동안 125개 이상의 직업과 다양한 의류, 액세서리, 스포츠 장비, 자동차, 인형의 집 등 수많은 바비 인형 라인의 제품이 출시됐습니다.
마텔은 지금까지 바비 인형을 10억 개 이상 판매했으며 전 세계를 통틀어 바비 인형은 1분마다 100개 이상, 바비 드림하우스는 2분에 한 개씩 팔리고 있습니다. 1986년에는 앤디 워홀이 바비를 그렸고, 2009년에는 뉴욕 패션 위크에서 바비 탄생 50주년을 기념하는 런웨이를 선보였으며, 2016년에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700개의 바비 인형 컬렉션을 전시하는 등 바비는 문화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마고 로비(Margot Robbie)가 바비 역을, 라이언 고슬링(Ryan Gosling)이 켄 역을 맡아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른 실사 영화 <바비(Barbie)>에서 루스 핸들러 역은 레아 펄먼(Rhea Perlman)이 맡았습니다. <바비>는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LA 출신 아메리카 페레라(America Ferrera)가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고, 주제가상(‘I'm Just Ken(나는 그냥 켄)’, ‘What Was I Made For(난 뭘 위해 태어난 걸까?)’) 등 8개 부문에 최종 후보로 올랐습니다.
샐리 라이드(Sally Ride)
산 페르난도 밸리(San Fernando Valley) 인근 엔시노(Encino)에서 태어나고 자란 샐리 라이드는 미국 여성으로는 최초로, 전 세계에서는 세 번째로 우주 비행에 성공한 여성입니다. UCLA에서 물리학을 전공하는 유일한 여학생이었던 그녀는 스탠포드 대학교에 편입해 1973년, 물리학 학사와 영문학 학사 학위를 취득하고, 그 후 물리학 석사와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1977년 1월, 샐리 라이드는 우주왕복선 프로그램의 우주 비행사를 모집하는 NASA 광고를 보고 응모했습니다. 수천 명의 지원자 중, 라이드는 최종 후보 208명에 들었습니다. 1년 뒤, 그녀는 최초로 여성과 소수자 우주비행사를 포함한 ‘NASA 우주비행사 8기 그룹(NASA Astronaut Group 8)에 선발됐습니다. 1979년 8월, NASA는 라이드를 비롯해 35명의 우주비행사 훈련생이 훈련과 평가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공식적으로 우주비행사 자격을 얻었으며 우주 비행 크루로 선발될 자격을 갖추게 되었다고 발표했습니다.
샐리 라이드는 두 번째와 세 번째 우주왕복선 임무에서 지상 기반 캡슐 커뮤니케이터(CapCom)로 일했으며 로봇 팔, 일명 ‘캐나담(Canadarm)’이라 불리는 왕복선 원격 조작기 시스템(Shuttle Remote Manipulator System, RMS)을 개발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1982년 4월, NASA는 샐리 라이드가 STS-7 임무(STS-7 mission)에 투입될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1983년 6월 18일 케네디 우주 센터(Kennedy Space Center)에서 우주왕복선 ‘챌린저(Challenger)호’가 발사됐고, 샐리 라이드는 임무 전문가(Mission Specialist)으로 탑승했습니다. 샐리 라이드는 미국 최초의 여성 우주비행사이자 32세의 나이로 최연소 미국 우주비행사가 된 인물입니다. 역사적인 우주 비행 중 여러 개의 위성이 배치됐습니다. 챌린저호는 6월 24일, 에드워즈 공군 기지(Edwards Air Force Base)에 착륙했습니다.
라이드는 1984년, 챌린저호에서 STS-41G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두 번째 우주 비행을 했습니다. 이 임무는 우드랜드 힐스(Woodland Hills)에 있는 태프트 고등학교(Taft High School) 출신으로 미국 여성 최초로 우주 유영에 성공한 캐스린 설리번(Kathryn D. Sullivan)과 샐리 라이드, 두 명의 여성 대원이 함께한 최초의 임무로 역사에 기록됐습니다. 라이드는 1987년에 NASA를 떠나기 전까지 우주에서 343시간 이상을 보냈습니다.
2001년, 샐리 라이드와 그녀의 인생 파트너인 탐 오쇼네시(Tam O’Shaughnessy) 박사는 생각을 같이하는 동료 세 명과 함께 모든 소년 소녀들이 배경에 구애받지 않고 STEM(과학, 기술, 공학, 수학) 교육을 받고, 과학 문해력을 증진할 수 있도록 샐리 라이드 사이언스(Sally Ride Science)라는 회사를 설립했습니다. 2012년에 라이드가 사망한 후, 이 회사는 UC 샌디에이고 대학을 근거지로 하는 비영리 단체가 됐습니다.
샐리 라이드는 2013년 11월, 백악관 행사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오쇼네시 박사에게 수여한 사후 대통령 자유 훈장을 받았습니다. 미 해군 연구함대 최초로 여성 과학자 이름을 딴 ‘RV 샐리 라이드’, 2018년에는 미국 우편 공사(USPS)에서 영원 우표를 발행하는 등 수많은 영예를 얻었습니다.
미국 여성 쿼터(American Women Quarters) 시리즈의 두 번째 동전(25센트)을 장식한 샐리 라이드는 2022년 3월, 미국 화폐 새겨진 첫 번째 성소수자로서 새로운 역사를 썼습니다.
월리스 애넌버그(Wallis Annenberg)
월리스 애넌버그는 로스앤젤레스에 본부를 둔 애넌버그 재단(Annenberg Foundation)의 의장이자 재단장, 그리고 최고 경영자로, 미국 내외의 비영리 단체에 자금을 조달하고 지원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애넌버그 씨는 또 센추리 시티(Century City)에서 2020년까지 운영되었던 애넌버그 사진 전시관(Annenberg Space for Photography) 개관을 맡기도 했습니다. 그 외에도 베벌리 힐스(Beverly Hills)의 월리스 애넌버그 공연 예술 센터(Wallis Annenberg Center for the Performing Arts)와, 공공 수영장 및 지역 공동체 시설인 산타모니카(Santa Monica)의 애넌버그 커뮤니티 비치 하우스(Annenberg Community Beach House)를 짓기도 했습니다.